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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속의 여신 1 (브리짓, 아테나, 미트라 여신)

여성신,신화/그리스,로마

by baesungsoo 2008. 7. 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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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영국 조지 4세

 

영국의 브리짓 여신 ( 1826년 영국 조지 4세)   (출처- http://blog.naver.com/liebemilch )


사진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영국의 브리짓 여신이 나타나 있다. 이 여신은 분명 켈트족 고유의 여신임에도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는데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로마인이 브리타니아 섬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을 정복한 로마인들은 이방의 신들에게서 자신들의 신과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때문에 그 성격이 비슷한 신들은 로마식으로 부르게 되는데, 그 중하나가 브리짓을 미네르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켈트인에게는 브리짓이라 불리는 여신이 다른 한편에서는 로마인들에 의해 미네르바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로마의 지배가 계속 되며 알맹이는 켈트 고유의 여신이면서 겉모습은 그리스-로마식의 여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여신의 기능이 강조된 시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이다. 게르만 전통의 살리크 법에 의하면 여성은 왕이 될 수 없었지만 섬나라라는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의해 엘리자베스는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결국 이를 빌미로 대륙의 국가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압박해 왔다. 분명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초기에는 처녀라는 상황이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녀의 영리한 대처로 치세의 중반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일부러 끊임없이 자신의 처녀성을 강조하며, 무의식적으로 성모마리아와 켈트 고유의 여신 브리짓 또는 로마의 여신 미네르바와 자신을 동일시하려 노력하였다. 때문에 그녀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진주 장식을 유난히 즐겼으며, 심지어 네덜란드 원정에 나서는 군대를 사열하러 나서는 자리에서는 은빛 갑옷을 입고 나타나 미네르바 여신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새해를 맞아 여왕에게 선물을 주는 전통에 따라 해군장관이었던 하워드가 그녀에게 바친 선물은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반달 모양’의 장식품이 있었는데, 이는 역시 처녀성이 강조된 여신 아르테미스를 연상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여신 역시 다른 어떤 주화에 나타나는 브리짓 여신 보다 처녀성과 야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녀의 왼쪽 발 아래로 보면 다른 주화에서는 보기 드문 사자의 얼굴이 살짝 보인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곰과 사자와 같은 야수와 등장하는 여신은 주로 아르테미스 (디아나)이다. 그녀는 다른 어떤 여신보다도 처녀성이 강조되어 있어 자신의 목욕 장면을 훔쳐본 악티온을 사슴으로 변하게 하여 그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는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브리짓을 비롯하여 미네르바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발키리에는 전쟁의 여신이거나 전사들과 관련된 여신이다. 이러한 여신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생명을 탄생하고 키우던 여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유아기에 경험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과 잘못에 대해 엄격한 어머니의 이중적 모습이며, 좀 더 신화적으로 접근한다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자연의 냉혹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온 여신들 속에서도 충분히 그러한 모습은 내재되어 있었다. 키벨레는 아티스가 자신의 사랑을 져 버리자 그가 잔혹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며, 케레스의 기쁨은 대지에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그녀의 슬픔은 황폐와 죽음을 불러왔다. 또한 그녀의 잃어버린 딸 역시 밀알로서 부활을 상징하기에 앞서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녀의 남편은 명계의 신 하데스이며,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신화에서 데메테르는 톡톡히 죽음의 여신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두려움에 의해 삶과 죽음을 멀리 떼어놓으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잊으려 하지만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쌍둥이인 셈이다. 때문에 생명을 주는 여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거두어가는 여신 역시 필요했던 것이다.

 

 1921년 조지5세 1페니 영국  

영국의 브리짓 여신 ( 1921년 조지5세 1페니 영국)  (출처- http://blog.naver.com/liebemilch )


동전의 가운데 삼지창을 든 여신이 다른 한 손에는 유니온 잭의 문양이 담긴 원형 방패를 붙잡고 앉아있다. 얼핏 그리스식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신화 속의 여신이라고 짐작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여신은 켈트족 고유의 여신이다. 켈트족에게는 브리기트 Brigit라는 이름의 모신이 있다. 새의 형상을 하였고, 창과 원판을 지닌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일랜드 신화에서 브리기트 Brigit, 브리그히트 Brighit는 하늘여신이자 우리의 조앙신과 같은 화덕의 수호자였다. 기독교하에서 St. Brigit라 불리며 아일랜드의 수호여신이 되었다. 기원전 8~5세기에 브리타니아 섬에 거주하던 켈트족의 일파인 브리트 Brit라는 민족명은 이 여신의 이름에서 파생되었다. 그 외에도 영어의 bride ‘신부’, breed '낳다 번식하다, bird ‘새’(여신은 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등도 모두 여신 Brigit에서 파생되었거나 같은 언어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생식, 생산, 새 등 여신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여신의 손에 들린 삼지창기호는 삼위일체 신의 상징이었는데, 이 기호는 무기로 사용된 삼지창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이는 각 갈래의 끝이 뭉툭하거나 혹은 각 갈래가 구불구불한 삼지창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지창 기호는 신석기 시대 여성상에서 물, 비, 생명나무 등과 같은 여신의 상징들이 위치하였던 곳에 정확하게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여신의 삼위일체 관념과 결부되는 비기호이며, 삼지창은 여신의 한 상징으로서 그녀의 머리 위에도 표현되었다. 어쩌면 삼지창 기호는 새의 발에서 기원하는 세 손가락 표현에서 유래하였을 수도 있다. 앞서 켈트족의 여신 브리기트가 새의 형상을 한 여신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관련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원형 방패 안에는 유니온 잭이 새겨져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유니온 잭은 흰색바탕에 십자가가 담긴 영국의 성조지기, 푸른색바탕에 흰색의 대각선 십자가가 담긴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류기, 흰색 바탕에 붉은색의 대각선 십자가가 들어간 아일랜드의 성패트릭기를 합성한 것이다. 

 

<아테나 여신>

 

1851년 프랑스 1상팀 

 

아테나 여신 (1851년 프랑스 1상팀)   (출처- http://blog.naver.com/liebemilch )


1851년이면 나폴레옹의 실각 후 들어선 제 2공화국 시절이며, 이 때 이미 나폴레옹 3세가 집권했을 때입니다. 때문에 조금 시기가 지나면 프랑스 주화 여기저기에 나폴레옹 3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혁명의 상징인 여신의 얼굴이 나타나 있네요. 

 

1912년 그리스 5드라크마 

 

아테나 여신 동전 (1912년 그리스 5드라크마)  

 

1973년 그리스 1드라크마 

 

아테나 여신 동전 (1973년 그리스 1드라크마)   (출처- http://blog.naver.com/liebemilch )


이 주화에는 매우 인상적인 올빼미 도상이 나타나 있다. 사실 이 올빼미 도상은 고대 그리스의 은화에 나타나던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그 기원을 따지자면 신화만큼이나 무척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올빼미가 아테나 여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올빼미 도상을 보면 무엇보다도 그 두 눈이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테나 여신에게 부여된 성격과 마찬가지로 밤이나 낮이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러한 전시안의 의미이다. 하지만 이 처럼 눈이 강조된 도상은 심리적으로나 신화적으로나 무척 복잡한 기원이 있다. 우선 이와 같은 올빼미 도상의 기원이 된 수메르의 눈의 여신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500~3000년 경이다. 여기에는 지혜를 일깨워 주는 전시안이라는 개념과 함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엄격함과 억압적 의미도 담겨 있다. 구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진 수많은 비너스 상들은 이와는 반대로 대개 얼굴이 생략되어 있는데, 그 까닭이 제작자 자신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에 거울이 없던 시대에 어쩔 수 없었던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자신들을 바라보며 감시하는 여신들의 두 눈이 두려웠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후자의 의견을 따른다면 결과적으로 눈의 여신의 두 눈을 강조했던 수메르 인들이나 비너스 상들에서 의도적으로 두 눈을 생략했던 선사인들 모두 두 눈을 가진 여신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눈의 여신상들이 발견된 장소가 기원전 2800년 경의 신전 바닥 아래 깊숙한 곳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메르 인들 역시 그것을 만들기는 했지만 세상으로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미트라 여신>

 

1934년 페루 1솔 은화 

 

미트라신 ( 1934년 페루 1솔 은화)   (출처- http://blog.naver.com/liebemilch )


여신의 오른 손에는 태양의 얼굴이 새겨진 방패가 놓여 있고, 왼손에는 자유의 모자 (또는 미트라신이상징인 프리기아의 모자)가 걸린 창 또는 막대기를 들고 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전체적인 구도가 영국의 1파운드 주화와 닮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는 투구 대신에 올리브 가지로 된 (것으로 짐작되는) 월계관을 쓰고 있고, 전형적인 그리스-로마식의 판갑으로 된 갑옷 대신에 갈리아나 페르시아 식의 미늘 갑옷을 입은 것이 가슴팍의 옷 깃 사이로 살짝 보인다. 그리고 워낙 작게 새겨져서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 갑옷의 가운데 쯤 볼록하게 퇴어나온 부분은 아마도 고대 여신을 상징하는 곰이나 사자의 머리장식인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창 끝에 걸린 모자를 자유의 모자 또는 프리기아의 모자라고 했는데, 이를 방패의 태양과 연관시켜 보면 둘 모두 미트라신의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단지 그 하나의 의미로만 읽은 필요는 없다. 역시 여신의 앞으로 놓인 작은 기둥 위에는 개선식의 장군에게 씌워주는 승리의 월계관과 함께 기둥을 감는 리본에는 Libertad (자유)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경우에는 여전히 '자유의 모자'란 의미로 볼 수 도 있다. 뒷면에는 이미 여러번 설명한 적이 있는 페루의 국가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바티칸 5리라, 사진 속의 교황은 피우스 12세

 

미트라신 (1953년 바티칸 5리라-정의의 여신) (출처- http://blog.naver.com/liebemilch )


위 주화를 보면 머리에 태양관을 쓴 여인이 오른 손에는 검을 왼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타로카드에서도 그렇고 이러한 도상은 전통적으로 '정의'를 의미한다. 더구나 그러한 추측을 뒷바침하듯이 여인의 아래에는 'JVSTITIA (정의)'라는 글자까지 새겨져 있다. 하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여인이 머리에 태양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태양신을 소개하며 언급되었지만 동방의 태양신 '미트라'는 약속과 우정, 정의를 수호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정의'라는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도상은 없겠지만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의 중심인 바티칸에서 이방신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다. 아니면 고대적에 들어온 이방신의 이미지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더 이상 거부감을 주는 이질적인 것이 아닌 익숙한 이미지가 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전히 여성의 지위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카톨릭 교회의 입장에 반해 바티칸 주화에는 여신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진 속의 정의의 여신은 물론이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소장하고자 하는 다른 많은 바티칸 주화에서도 거울을 들고 있거나 사자를 거느리고 있는 등의 많은 여신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따지고 보면 성모 마리아 부터가 여신적이라고 볼 수 있으니 그리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의 교황은 피우스 12세이다. 그분의 눈 앞의 스크레치 같은 것은 안경으로 사진 등에서 안경을 쓰고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피우스 12세는 중세 이후 인기가 하락하던 교황의 지위를 오늘날과 같이 다시금 올린 교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우스 12세의 재임 기간중 특기할 만한 사실은 교황이 방송매체를 통해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 때 부터 시청각 매체가 교황을 담기 시작했는데, 이의 파급 효과는 이전의 다른 어떤 선전 효과를 훨씬 능가했다. 전달 속도가 빠르고 대중 동원력이 큰 방송매체를 통해, 교황이 카톨릭 교회의 유일한 책임자임을 인식시킬 수 있었으며, 이로써 교황이 지역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950년 성년에는 250만명이 순례자들이 바티칸을 찾았다고 하니 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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