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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석굴(인도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사원)

타종교신전/힌두교사원

by baesungsoo 2005. 5. 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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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라 석굴 사원         (출처- http://blog.daum.net/antiright, 대마왕 방랑기)

 

엘로라는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엘로라 마을 근처의 석굴유적이다. 아우랑가바드의 북서 20km 지점에 있는 바위산 서쪽 사면(斜面)에 석굴 34개가 2km에 걸쳐 파여져 있다. 남쪽에서 세어 1번에서 14번 석굴은 불교사원, 15번에서 29번까지는 흰두사원, 나머지 34번까지는 자이나사원에 속해있고 불교 사원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형식은 하나하나 모두 다르다.  

 

불교 석굴 사원 (1-14 석굴)

 

 불교석굴 사원

 

불교석굴 사원

 

불교석굴 사원 10 굴, 비슈와카르마 불교 석굴, 7세기

 

불교석굴 사원 10굴 석굴 불상

 

산치탑과 같은 아쇼카 시대의 작품 속에서는 아직 인물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신 깨달음 혹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나무인 보리수를 조각하거나 탑과 상징물로 표현했지만 기원후 1세기경 인도서북 간다라 지방이 그리이스의 영향을 받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 인간의 모습인 붓다의 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깨달은 자를 의미했던 붓다 역시 점차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되면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어 불교의 종교화가 이루어지기 시작 되었다. 엘로라 불교석굴에서도 보리수나 탑과 같은 상징물의 석굴과 인간 모습을 한 붓다의 조각품을 볼 수 있다. 주로 3-7세기에 주로 만들어졌고(불교는 8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함) Vihara(비하라)는 수도승들의 수도원이고 Chaitya(차이티야)는 예배들이는 곳으로 구분하는데 대표적인 Chaitya는 10번 동굴이다. 

 


불교석굴 사원 12 굴

 

힌두교 석굴 사원(15- 29 석굴)

 

15번 힌두 석굴사원     (출처- http://blog.daum.net/antiright, 대마왕 방랑기)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5번 힌두 석굴사원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출처- http://blog.daum.net/antiright, 대마왕 방랑기)  

 

아리안족의 브라흐마니즘이 이렇듯 왕권 강화와 맞물려 국가의 강력한 보호 아래 흰두이즘이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여 급속하게 성장하니 자연 불교가 쇠퇴하고 인도인의 생활양식인 카스트제도 그리고 인도의 중심 종교. 사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발생한 불교는 해탈의 경지로 자기 성찰에 의한 자비를 내세웠고, 흰두는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욕망에 의해 행해지는 삶과 죽음의 윤회인 카르마에 대한 해탈을 무욕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런 사상이 종교에 덧씌워져 우주를 창조한 브라흐마, 우주 유지의 비슈누, 파괴를 담당한 쉬바의 세신이 바로 무욕을 결정하는 완전한 신성이라고 생각하고 '푸라나'라는 신화 역사집을 편찬해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가운데 브라흐마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비슈누를 섬기는 바이슈나비즘은 주로 북인도 지방의 대중적 종교로 , 쉬바신을 섬기는 쉐이비즘은 남인도 지방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엘로라 사원들은 7-9세기에 만들어진 브라만 동굴이다. 동굴 16번이 대표적이다.  16 석굴은  힌두교의 시바신을 모신 사원으로, 라슈트라쿠타 왕조 크리슈나 1세(재위 756∼773) 때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다. 제일 안쪽의 높이가 33m, 안까지의 거리가 54m, 정면의 길이가 46m로 시바신의 상징인 링거를 모신 본전(本殿)이다. 낭디(황소)전(殿)과 누문(樓門)이 좌우의 균형을 잡고 한 줄로 늘어서고, 거기에 회랑(廻廊)이 둘러쳐진 대규모의 것으로, 남형사원(南型寺院) 건축의 대표작이다. 그 벽면에는 시바 등의 여러 신상(神像)과 라마야나를 제재로 한 부조(浮彫)가 있다.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8세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0-22번 힌두 석굴사원

 

29번 힌두 석굴사원,  레나굴, 6세기

 

29번 힌두 석굴사원, 힌두교 3신, 브라흐마, 비쉬뉴, 쉬바신

 

 29번 힌두 석굴사원

 

29번 힌두 석굴사원

 

 29번 힌두 석굴사원

 

29번 힌두 석굴사원 

 


엘로라 29번 석굴, 힌두교 사원 

 

자이나교 석굴들 (30-34 석굴)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번 자이나교 석굴 사원, 쵸타 카일라사

 

31-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평면도

 

자이나교는 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 종교이다. 불전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vra)가 재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하여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하여 '불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문화사적 배경, 교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32굴  차트루무카 사당의 남방형 시카라, 9세기

 

제32굴 차트루무카 사당의 남방형 시카라, 9세기 

 

제32굴의 차트루무카 사당(사면당), 9세기 

 

제32굴(인드라·사바)의 상층 기둥군, 9세기

 


제32 석굴, 자이나교 사원, 티르탄카라 상 

 

제33굴(자간나트·사바)의 상층, 9세기

 

제33굴의 쿠베라상, 9세기

 


제 34 석굴, 자이나교 사원, 마다파 내부, 9세기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30-34번 자이나교 석굴사원

 

고대 인도의 불교


창시기(創始期)의 불교를 말하며, 경전들은 석가의 생애 중의 가르침을 스승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석가가 직접 설한 교법을 판별하기는 곤란하다. 교단도 이미 발족되어 석가 입적 후 약 100년 동안은 완전한 통일이 유지되었다. 불(佛) ·법(法) ·승(僧)의 3보(寶)는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데, 승(僧:敎團)은 출가신자(出家信者)인 비구 ·비구니와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로 이루어져 계율(戒律)로 규제되며 부처를 중심으로 모여 그 법을 실천한다. 이 재가신자는 단가제도(檀家制度)에서의 신자와는 달리 3보에의 귀의(歸依)를 서약할 뿐 아무런 속박도 없으며 그 대신 출가신자에 대한 의식(衣食)의 재정적 지원을 맡았다. 석가는 태자(太子) 시절의 물질적으로 풍족하던 생활에서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뇌하였으나, 그 두 극단의 고뇌를 버림으로써 중도(中道)를 깨닫고 불타가 될 수 있었다. 중도란 일체 편견(偏見)에 구애되지 않는 자세이며, 올바른 견해 ·결심 ·언어 ·행위 ·생활 ·노력 ·사념(思念) ·명상(瞑想)의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5온(蘊)의 일체는 고(苦:苦諦), 그 고의 기원(起原:集諦), 고의 초극(超克:滅諦), 초극에 이르는 길, 즉 도제(道諦)라는 4개의 진리(四諦)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 팔정도이지만, 그 중 도제의 내용이야말로 팔정도 바로 그것이며 그 실천에 의해서만 중도가 얻어진다. ‘일체는 고이다(一切皆苦)’라는 말에서 생각해 보아도 5온의 이합(離合)은 항상 변천(變遷)하는 것이며(諸行無常), 존재하는 것에는 상일(常一) 주재(主宰)하는 입장은 없는 것으로(諸法無我), 전변(轉變) 무상한 세계에서 상(常)을 구하기 때문에 고가 생기는데, 팔정도의 실천에서 각성이 열리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도 설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원시불교의 사상이다.

 

고대 인도의 부파불교


불멸(佛滅) 후 100년까지 교단은 착실하게 확대 ·발전을 이루어, BC 3세기에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이 귀의하여 불교는 거의 인도 전체에 퍼져 교세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교단의 확대에 따라 내부에 의견의 대립이 나타나 불멸 후 100년이 지난 무렵부터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혁신적인 대중부(大衆部)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다. 한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胄部) ·정량부(正量部) ·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이어서 경량부(經量部)가 분출되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상좌부 ·대중부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는 별로 없으나 혁신적인 대중부에는 후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발전할 기미가 엿보인다. 또한 상좌부 불교는 남방불교로서 오늘에 전한다. 〈대승불교〉 출가신자(승려) 중심인 종래의 불교에 대항하여 기원 전후부터 재가신자를 포함하는 신앙으로의 탈피를 원하는 대승(大乘)의 운동이 인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불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에 대한 신앙을 높이는 재가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있어, 이것도 대중운동에 합체하여 초기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

 

고대 인도의 불상


불상이 최초에 만들어진 것은, 중앙 아시아에서 중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운 쿠샨왕조의 시대(A.D 1세기 후반∼3세기)에, 서북인도(파키스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토우라의 양지방에서였다. 쿠샨왕조는 인도, 이란, 헬레니즘·로마의 제문화가 뒤섞인 시대로, 불교신자들간에서의 불타의 신격화의 움직임과 쿠샨조문화가 가진 제왕 신격화의 관념 및 造形이 융합해서 불상이 탄생 할 것 같다. 간다라불은 헬레니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로마의 황제상을 모델로 한 것 같은 조상이다. 얼굴 모양은 다른 어떤 불상보다도 인간적이고, 두 발도 물결모양의 자연스런 형을 하며 머리 위에서 묶어서 육계한다. 체구는 정확한 인체구조에 입각하여 표현했고, 왼쪽 다리에 중심을 두고 오른쪽 다리를 놀리는 콘트라포스트의 전통이 보존되고 유지되어 있다. 두꺼운 승의가 전신을 덮고 옷깃의 표현은 형식화가 현저하다고는 해도, 사실적인 주름의 표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간다라 후기(4∼6세기)에서는 스토우코에 의한 정숙, 優美한 불·보살상이 다수 만들어졌다. 쿠샨조의 마토우라불은 간다라불과 대조적으로, 육체의 생명감이 넘치고 또한 위엄이 가득한 웅 휘한 양식을 보인다. 즉 둥근 얼굴형에서는 생기발랄함이 넘치고, 양 어깨는 딱 바라져서 치켜 올 라갔으며, 팔꿈치는 강하게 뻗었고, 옷은 얇아 들여다 보여서 힘찬 체구가 들어난다. 마토우라불에 서는 전대부터의 ヤクシャ(약샤)의 造像의 전통과 쿠샨조 제왕상이 융합한 조형을 보이고 있다. 마토우라에서도 불상과 보살상이 만들어졌지만 간다라에 비해서 그 수는 적다. 고대 인도의 최전성기인 굽타조(4세기후반∼6세기)에서 불상은 완성된 미를 보인다. 인도적 생명감에 넘치며, 그 위에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정숙함을 띤 조형이다. 얼굴형은 명상을 하는 듯 하고, 인체는 균형에 잡혀있고, 한숨을 쉬는 듯한 육체의 원만함이 있다. 마토우나와 사루나토에서 이 같이 단정하며 아름다운 굽타불이 만들어졌지만, 전자의 ㅜ상이 옷깃의 주름을 물결같은 유려한 곡선의 반복으로 표현항 것에 반해, 후자의 불상에서는 옷긱선을 완전히 표현하지 않고 얇은 옷을 통해서 優美한 육체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사루나토에서는 미륵, 관음, 문수를 처음으로 하는 대승적 보살상을 다수 만들었던 것도 주목된다. 인도의 불상은 5세기 굽타시대에 고전적인 완성을 이룩했고, 그 후의 포스트 굽타시대에서는 이 고전적인 규범에 기초하면서 유화(柔和)를 추구하거나 혹은 육체의 풍만함을 강조했고 역동감이 풍부한 표현을 추구하거나 했다. 파라조(9∼12세기)에서 불교미술은 최후의 번영을 누리지만, 불상은 양식적인 면에서는 사루나토불에서 본보기를 취하며 단순히 그 답습으로 끝나고 형식에 치우친 것이 많다. 밀교상을 포함한 많은 존상이 만들어지고, 풍부한 도상(圖像)체계를 낳았다는 점에 파라불의 특징이 있다.

 

고대 인도 힌두교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라문교(婆羅門敎)가 복잡한 민간신앙을 섭취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聖典)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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